귄터 안더스의 문화종말론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 전공강의 '건축과문화' 기말 레포트)
인간에 의한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이에 대한 고민은 건축가, 사회학자, 예술가, 철학자 등 모두가 고민해 볼 만한 것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철학자들은 항상 근본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해왔던 사람들이다. 기술의 발전이 과거와 비교했을 때 우리를 보다 더 편안하고 다양한 삶을 제공할 수 있게끔 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기술에 의한 우리의 삶의 변화가 정말 좋은 쪽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귄터 안더스는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귄터 안더스가 다룬 내용들은 기술 발전으로 나타난 산업혁명, 즉 기계들에 의한 생산과 새롭게 등장한 미디어 사진, 영상, 라디오 등에 관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기술의 발전으로 가장 먼저 변화한 인간의 특성은 무엇인가?
인간이 기술을 발전시킨 까닭은 대부분이 인간이 가지는 신체적, 정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즉 인간은 기술을 통해서 의족과도 같은 것들을 인간에게 장착함으로써 기존의 인간이 할 수 없었던 일들을 기술을 통해서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혹은 의도치 않게 기술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사진은 인간의 인식적 한계를 극복한 기술의 대표 사례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인간들은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인식하고 있는 생각과 대상만을 볼 수 있었고 오로지 그것만을 인식할 수 있었다. 즉 옛날의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이 인식하지 못 하였던 것은 없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제는 알고 있듯이, 인간이 어떤 것을 인식한다고 할 때 그 안에서는 두 가지로 나뉜다. 인간이 인식한 것 중에서 정말로 인식한 것과 인식한 것이지만 인식하지 못 한 것으로. 앞의 것을 우리는 의식한 것이라 부르고, 뒤의 것을 우리는 의식하지 못 한 것, 즉 무의식이라 부른다. 사진은 이 인간이 의식한 것 중에서 의식하지 못 하였던 것, 무의식을 시각적 정보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만약 우리가 사진을 찍는다고 해보자. 우리는 우리가 찍으려는 대상, 피사체에 집중하고 있다면, 피사체 뒤로 무엇이 지나가는지 혹은 내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오로지 우리가 사진을 찍은 다음에야, 우리가 집중하고 있던 피사체 뒤에 있는 기이한 것을 찾을 수 있다. 사진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준다. 동일한 시간대에 동일한 시각적 정보가 내 눈에 들어왔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나에게 인식된 것이지만 의식하지 못 한 무의식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사진은 이런 점에서 인간의 의식의 경계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까지 넓혀주었다. 이런 점에서 사진이란 기술은 인간이 가지고 있던 한계를 극복시켜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언뜻 기술 발전이 인간에게 긍정적으로 비추어진다. 실제로도 발터 벤야민이라는 사람은 사진이라는 것을 통해 인간이 발전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복제가 가능하게 되면서 미술이라는 원본이 가지고 있던 아우라가 몰락하고 모든 사람들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그런 시대에 도래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귄터 안더스는 이런 입장과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기술 발전이 단순히 인간이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인간의 삶을 발전시켰지만, 인간이 오히려 기술 발전을 따라가지 못 하였음을 지적한다. 영화 <매트릭스>와 <터미네이터>에서 우리는 이런 모습을 잘 살펴볼 수가 있다. 각 영화에서 나오는 기계, 기술들은 인간에 의해서 나타난 기술들이다. 하지만 그 기술들에서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인간은 그 기술에 의한 문제점들을 대처하지 못 하고 오히려 인간이 기계에 의해 사육당하고, 멸종 직전까지 가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을 영화에서는 보여준다.
인간이 오히려 기술을 따라가지 못 함은 영화 말고도 현실에서도 직접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예이다. 원자력은 인간에 의해 나타난 기술이다. 하지만 그 기술에 의해 지금 지구와 인간에게 해가 될 수 있는 문제가 발생하였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이것을 확실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다. 귄터 안더스는 이런 것을 말하면서 인간이 오히려 자신들이 발전시킨 기술에 의해 인간학적으로 도태되는 상황을 보고 인간의 골동품성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예들은 귄터 안더스가 말하였던 예시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보고 인간의 골동품성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하였을까?
첫 번째는 기계 그 자체이다. 산업 혁명으로 인해 인간의 생산력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게 높아졌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인간의 노동은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산업 혁명 이전의 노동이란 수공업적인 노동을 뜻한다. 수공업에서는 생산을 하기 위해선 대부분의 과정에서 인간이 주체적으로 노동을 해야만 했다. 인간이 주체적이란 뜻은 노동 과정 중에 기계를 쓴다 하더라도 기계가 정말 도구적인, 노동에 있어서는 정말 부품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인간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주도적으로 일을 하는 그런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제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으로 돌아서면서 생산 활동에 있어서 인간과 기계의 위치가 역전한 그런 상황을 맞게 된다.
영화 <모던 타임즈>를 살펴보자. 이 영화에서는 인간이 노동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그 모습이 묘하다. 인간은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서 돌아가는 제품들의 너트를 조이기만 하는 단순한 행동을 맹목적이고 반복적으로 수행할 뿐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인간은 공장이라는 큰 기계 안의 단순한 부품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부품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더 이상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귄터 안더스는 기술이 발전한 이 시대에 더 이상 인간은 주체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귄터 안더스는 이러한 사실이 단순히 인간의 노동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체계, 시스템 등에서도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래서 두 번째로 든 예가 영상이다. 사진과 영상은 인간에게 새로 나타난 미디어들이다. 그렇다면 기존에 인간이 가지고 있던 미디어들은 어떤 것들일까? 인간에게 있어서 일차적인 미디어는 감각기관과 언어 등이 있다. 이런 일차적인 미디어의 특징은 인간이 감각기관이나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지만, 그것을 매개로 하여 이 세상을 인식한다던가 아니면 생각을 할 수 있게끔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있는 미디어란 그림이라던가 책이다. 이런 미디어들의 특징은 인간들이 주체적으로 그것들을 다루는 것에 있다. 하지만 영상이라는 미디어는 더 이상 인간이 주체적으로 다룰 수 없는, 생각할 수 없는 미디어라고 귄터 안더스는 보고 있다.
오래 전에 일어났던 911 테러 사건을 기억해보자. 나는 분명히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통하여 911 테러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보고 있는 화면이 정말로 현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 있어 실제 현실은 내 안방이 아닌 저 멀리 바다 너머 미국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즉 우리들은 실제 현실이 아닌 텔레비전, 영상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만들어진 가상, 하지만 우리는 현실이라고 믿는 미디어현실을 보고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우리가 실제 현실을 본 것은 아니지만, 다만 미디어현실을 보았을 뿐이지만, 우리는 실제로 그것을 보고 있다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와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받았을 때, 핸드폰으로 통해서 오는 친구의 목소리는 정말로 친구의 목소리일까?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은 핸드폰에 의해 정보가 재구성된 전자적 목소리일 뿐이다. 우리는 이 전자적 목소리, 즉 미디어현실을 그대로 친구의 목소리라고 믿는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엄밀히 말하자면 현실과 미디어현실은 구분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어느 새인가 현실보다는 미디어현실을 먼저 받아들이게 되었고, 미디어현실이 정말 현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중에 우리가 진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진짜 현실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면 그대로의 현실이 아닌 우리가 미리 받아들였던 미디어현실이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일까? 귄터 안더스는 후자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 인간들은 현실과 미디어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 현실과 미디어현실을 구분할 수 없게 된 것을 두고 귄터 안더스는 팬텀이라고 말하였다.
이 모습에서 인간이 주체성을 잃었음을 귄터 안더스는 말하고 있다. 인간이 어떤 사건이나 어떤 것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고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객관적인 현실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과 미디어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팬텀이 떠도는 이 세상에서 과연 무엇이 객관적인 현실이란 말인가? 그것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그저 자신에게 현실이라고 보이는 것을 현실이라고 믿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미디어를 맹신하게 된다. 이것은 더 이상 인간에게 어떤 사건에 대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 않음을 말한다. 우리는 이제 어떤 사건이 중요한가 안 한가를 판단할 때 그 사건이 뉴스에 등장하였는가 안 하였는가로 판단한다.
귄터 안더스의 이런 냉철한 시대 진단은 현대의 우리 삶을 돌이켜보면 대부분이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도 현재 일어나고 있는 KTX 수서발 철도민영화 사건만을 봐도, 제 3자의 입장에서는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더 이상 진짜 현실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는 우리의 사회상이 귄터 안더스가 말한 팬텀이 난무하는 세상, 매트릭스인 것이다. 더욱 암담한 현실은 이제는 더 이상 이런 상황에서 우리 인간에게는 스스로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던가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귄터 안더스는 이 상황에 대해 종말론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알면서도 이것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인 것이다.
201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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