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문화체험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발레를 관람하는 날입니다. 장소는 예술의 전당이지만, 저번 주에 공연 관람 때문에 여자친구를 계속 저녁에 만나서 오늘은 다른 기분을 내고자 점심부터 만났습니다. 한동안 추운 날씨에 하늘은 흐리다가, 이제는 완연히 봄이 다가오고 있는지 파스텔빛 하늘과 따스한 햇빛이 들었습니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운 감이 있어서 방심하다간 감기에 걸릴 것 같았죠.
오늘 데이트 목록엔 쇼핑도 포함되어 있어서 롯데백화점이 있는 곳으로 향할까 하다가, 가는 길에 이촌동이 있어 방향을 틀어 이촌동에서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기로 제가 일방적으로 정하였습니다. 이촌동엔 학부 저학년 시절 도시와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다 발견한 데이트 코스인데, 동네가 조용하면서 정갈하고 보도 또한 산책하기에 적당합니다. 북쪽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남쪽으로는 한강시민공원으로 이어져서 식사 후에 산책이나 관람하기에도 좋은 곳이지요.
길가를 걸어보면 아시겠지만, 이촌동에는 부쩍 일식집이 많습니다. 맛집을 검색해보시면 일식집이 많이 나오고, 디저트로는 빙수로 유명한 동빙고가 위치해있습니다. 하지만 전 여기선 일식집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예전부터 다니던 가게가 하나 있는데, 화덕피자 붐이 일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화덕피자집이 있습니다. 치즈와 도우가 일품인 집이어서 베이컨포테이토피자와 닭안심샐러드를 시켜먹습니다. 파스타도 시켰지만, 파스타는 여자친구 입맛엔 별로인 듯 하더군요.
식사 후, 날이 좋아서 산책도 할 겸 동빙고까지 걸어가기로 하였습니다. 이촌엔 아파트들만이 있는데, 가게들도 주로 아파트 상가의 형태로 있습니다. 다만 건축된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재밌는 풍경이 연출되더군요. 최근에는 삼성 래미안이 거대하게 들어서서 재건축되지 않은 아파트들과 대비되는 모습도 인상이 깊었습니다. 아마 이 동네는 천천히 재건축되겠지만, 부디 옛 아파트들이 더 오래 남았으면 좋겠군요.
따듯한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서 천천히 담소를 나누며 동빙고 빙수를 먹다가 소화가 되자, 쇼핑을 위해 차를 타고 백화점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아이쇼핑을 하다 시계를 보니 5시여서 급하게 예술의 전당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역시 운전하여 예술의 전당을 가는 것은 싫습니다. 덜 막히는 시간대이지만, 동부간선도로와 올림픽대교 그리고 경부고속도로는 차가 어마어마하게 막힙니다. 정체 시에 운전하는 건 고역이니 SCC이 있는 스팅어에게 운전을 맡기고 예술의 전당까지 갑니다.
공연 전에 여유롭게 오페라 하우스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없어서 둘러보고 사진을 찍기가 수월하더군요. 조기예매로 할인을 40% 받아 저렴한 가격에 R석을 예매한 표를 받고, 관람 전 샌드위치를 먹고 좌석에 앉았습니다. 이번 공연에는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았고, 초청 무용수로는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와 마리아 쉬린키나가 있습니다.
프로그램은 고전 무용부터 근현대의 무용까지 다 아울렀습니다. <백조의 호수>와 <지젤>, <돈키호테>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 이 무용들은 워낙 유명하니 달리 할 말이 없었지만, <춘향>과 <해적>의 경우 무용수의 성취가 뛰어나 관객들에게서 좋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일 좋았던 무대는 <화이트 슬립>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선 조금 더 뒤에서 자세히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오늘 발레까지 관람함으로써 전시와 행위예술, 관현악, 연극, 뮤지컬 그리고 오페라 등 거의 대부분의 문화예술을 겪어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가장 잘 와닿았던 예술은 발레였던 것 같습니다. 연극과 뮤지컬 그리고 오페라와는 달리 인간이 태초적으로 지니고 있는 몸을 이용하여 춤을 추는 것이 단순히 저런 움직임까지 보이다니 멋지다라는 것이 아니라, 대사도 없이 그 사람들의 감정과 이야기가 느껴진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여지껏 관람한 것들 중에서 감정이 잘 와닿는 예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고전 무용보다는 현대 무용에서 더 잘 느껴졌습니다. <화이트 슬립>은 치매 환자가 가지는 인식을 표현한 무용입니다. 이 무대에는 고전이 가지는 이야기의 주인공도 없으며, 주인공은 오로지 이 무용을 보는 관람객 밖에 없습니다. 이 무용은 치매 환자가 자신의 인지에서 느끼는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에서 나 자신이 느끼는 인식의 표류를 표현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관람객은 구분하기 쉽지 않은 의식과 무의식의 행위들을 보면서 혼란함과 답답함을 느낍니다. 이 무용에서는 나 자신을 명확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있어 이 무용이 더 와닿았던 이유는 아마 제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어서 그럴 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가진 우울증과 불면증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약처방은 제 자신의 인지를 명확하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이트 슬립>의 무대 뒤를 비추는 영상 속 연기가 흩날리고 다시 빨리듯 되돌아가면서 무용수들은 다시 되감는 듯 거꾸로 춤을 추기 시작하고, 의식이라 할 수 있는 흰 무용수는 다시 연기가 피어나는 춤을 추면서 이 무용은 마무리됩니다. 너무나도 인상이 깊었고 깨달음도 많았던 무대라 이것에 대해선 추후에 다시 글을 써보려 합니다.
달빛이 예술의 전당을 비출 때, 우리들은 오페라 하우스를 나왔습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은 공연이 펼쳐지는 이 공간에 대해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전 무용부터 현대 무용까지 볼 수 있었던 무대였기에 든 생각일 겁니다. 여기선 간단하게 적자면, <화이트 슬립>의 배경이 되기엔 이 오페라 하우스는 너무 권위적이며 색이 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나 CJ토월극장과 같은 공간에서 공연을 관람하였다면 아마 이 무용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에 더 집중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생각을 정리하여 별도로 글을 작성해보고자 합니다.
앞선 오페라 갈라쇼 관람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유니버셜 발레단의 공연은 상당히 인상이 깊었습니다. 앞으로 있을 <지젤>도 기대가 됩니다. 저는 이미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국립발레단의 <지젤>을 예매하였지만, 유니버셜발레단의 <지젤> 또한 관람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과연 두 발레단의 무용은 다른 감정을 관람객에게 어떻게 선사할지가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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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