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대론 + 정합론 = ?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전공강의 '인식론' 기말 레포트)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이 물음에 철학자들은 다양한 답을 내놓았다. 어떤 철학자는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인식이 형성되는 과정이 신빙성이 있는 믿음 형성과정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또 어떤 철학자는 믿음을 형성하는 사람이 인식적으로 의무를 다하여야 그 믿음이 정당화된다고 하였다. 이런 생각과는 달리 믿음이 형성되는 구조에 대해서 생각하고 어떤 믿음이 그 구조에 합당하여야 그 믿음이 정당하다고 생각한 철학자들이 있다.
이런 사고에 포함되는 이론이 토대론과 정합론이다. 토대론은 개별 믿음들이 각자 정당하게 되었을 때 결과적으로 가지게 되는 모습에 대해 말하는 이론이다. 토대론에서는 정당한 믿음들이 형성되었을 때, 가장 기초가 되는 믿음과 그 믿음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믿음으로 형성되는 구조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토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토대론이 인식정당성의 후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든다.
그렇다면 인식정당성의 후퇴는 어떤 문제인가? 그것은 어떤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선 정당화 된 어떤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오늘은 길이 얼어 걸을 때 조심하여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라면 우리에게는 오늘 날씨가 영하다 라는 믿음과 지금 길에는 눈이 쌓여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또한 이 믿음들이 정당화되기 위해선 오늘 온도계를 보았더니 영하를 가리키고 있었다 라는 믿음과 어제 눈이 내렸다 라는 믿음들이 또 필요하다. 이렇듯 어떤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정당화 된 어떤 믿음이 필요한데, 그 믿음들도 또한 정당화 된 믿음이 있어야 정당화된다. 이 과정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 인식정당성의 후퇴 문제이다.
토대론에 의하면 이 인식정당성의 후퇴가 일어났을 때 최종적으로 있는 믿음이 기초적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정당성의 후퇴가 무한히 일어날 수 없고, 인식정당성의 후퇴가 끊기게 되는 지점이 생기기 때문에 토대론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정합론은 어떠한가? 정합론은 어떤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라면 그 믿음이 어떤 정합체계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느낄 수 있듯 정합론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믿음이 아니라 정합체계이다. 그렇다면 정합론에서 말하는 정합체계는 인식정당성의 후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정합론에서는 인식정당성의 후퇴 문제에 대해서 정합체계에서는 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합체계에서 어떤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정합체계 안에 있으면 되는 것이고, 또한 그 믿음이 체계 안에서 다른 믿음 하나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체계 내에서 여러 믿음들과 얽히고설킨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두 이론은 인식정당성의 후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믿음이 정당화되는 과정에 대해 훌륭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각각의 인식론이 믿음체계에 대해서 적절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먼저 토대론을 살펴보자면, 토대론의 모델은 믿음을 정당화해주는 기초적 믿음과 믿음 사이의 관계가 단순한 것처럼 보인다. 어떤 믿음은 토대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초적 믿음과 믿음 사이의 관계가 단순하게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적으로 어떤 믿음에 대하여 생각을 해본다고 해보자.
P) 1 + 1 = 2 이다.
a) + 란 각 숫자를 더한다는 의미이다.
Q) 오늘은 길이 얼어 조심해야 한다.
a) 오늘 날씨는 영하이다.
1) 온도계를 살펴보니 영하를 가리키고 있었다.
b) 어제는 눈이 내렸다.
1) 어제 내린 눈이 그대로 있지 않았다.
2) 어제 내린 눈 중 일부는 녹았다.
c) 어제 내린 눈은 치워지지 않았다.
...
위의 P, Q 두 믿음을 한 번 살펴보자. 토대론에서 말하는 기초적 믿음에 대해 살펴볼 때, P의 경우에는 기초적 믿음과 믿음 사이의 관계가 확연하게 보인다. 그런데 Q의 믿음을 살펴보면 Q에 대한 기초적 믿음으로 보이는 것들이 여러 가지가 떠오른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초적 믿음 사이에서도 관계가 평등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평등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오늘은 길이 얼었다”라는 것에 대해서 과연 어떤 믿음이 가장 중요한가? 물론 저기에 나온 a, b, c 믿음 모두가 “오늘은 길이 얼었다”라는 믿음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하다. 다만 인식자의 가치관이나 상황, 성격 등에 따라 저 세 가지 기초적 믿음 중에서 하나를 더 중요하다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어떤 인식자는 정말로 동등하게 여길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인식자는 자신이 사는 곳이 아파트라고 해보자. 아파트에는 아파트를 관리하고 청소하는 관리인들이 있다. 이들은 눈이 내릴 때,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길이 얼지 않도록 눈을 청소하고 염화칼슘 등을 뿌리는 것이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인식자가 주로 다니는 곳의 길이 얼어있었다. 그렇다면 이 인식자는 저 세 가지 기초적 믿음 중에서 어제 내린 눈이 치워지지 않았다 라는 믿음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기초적 믿음과 믿음 사이의 관계도 애매하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오늘 길이 얼어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오늘 날씨는 영하이다 라는 믿음을 형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앞서 생각했던 관계가 역전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토대론에서 주장한 구조와는 다른 구조라고 여겨진다. 즉 믿음 사이의 관계가 상하구조가 아닌 다른 구조여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정합론이야 말로 정당한 믿음에 관한 합당한 구조인가?
정합론은 정합론자들이 구체적으로 말한 모델이 없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정합론이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번 학기 동안 강의에서 배웠던 내용을 토대로 정합론의 모델을 생각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파악한 정합론이라는 것은 점과 점의 연결, 즉 믿음 사이의 네트워크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이 네트워크에 속하는 것만이 믿음이 정당해지는 것에 있어서 중요하다. 그것이 정합론에서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정합론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점과 점의 연결, 믿음 사이의 네트워크는 평등한, 플랫flat한 네트워크일까? 이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에만 가능한 이야기인 것 같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항상 관심사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즉 관심사 외의 것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다가갈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 무관심한 것은 그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사람은 자신에게 의미 없는 것에 집중하지 않는다. 즉 무관심하고 의미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무의식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다음의 믿음들을 살펴보자.
1) 오늘은 길이 얼어 조심해야 한다.
2) 오늘 날씨는 영하이다.
3) 어제는 눈이 내렸다.
4) 어제 내린 눈은 치워지지 않았다.
5) 어제 어느 상수도관이 터졌다.
...
다음의 믿음들이 있다고 하였을 때, 아파트에 사는 인식자를 생각해보면, 인식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믿음은 1번 믿음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믿음은 4번 믿음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아마 2, 3번 믿음이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고, 5번 믿음은 거의 중요하지 않게 혹은 인식조차 안 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믿음들 사이에는 인식자에 따라서 중요도가 구별될 수 있다는 점과 또한 그 중요도는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네트워크 형태의 믿음체계에 대한 모델을 제안하는 바이다.
평등하고 플랫한 네트워크의 형태가 아닌, 바다에서 일렁이는 파도처럼 수면의 높낮이가 수시로 변할 수 있는 네트워크 형태이다. 이 모델을 따르면 인식자와 믿음에 따라서 중요도가 변하는 것을 반영할 수 있는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모델을 따르자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정말 기초적인 믿음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부정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다. 예로 데카르트가 말하였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그런 명제이자 믿음이다. 그런 믿음은 과연 저 파도에서 어느 지점에 있어야 합당한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바다를 볼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은 수면과 그 밑 빛이 통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바다 속까지 들어간다 할지라도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심해는 우리가 볼 수 없다. 이것을 믿음체계에 동일하게 생각해본다면, 바다의 수면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을 수 있는 믿음에 관한 것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토대론에서 말하는 기초적 믿음은 바다에서도 깊은 곳에 있는 심해와 같은 것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수면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믿음은 더 기초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심해는 해류가 흐르기는 하나 그 움직임이 수면과 비교하자면 거의 미약하다. 즉 기초적 믿음은 그 중요도의 변화도 거의 없다고 느껴질 수 있는 잔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013.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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